Le Dilettantisme/livres

[Livre] <콰이어트> /알에이치 코리아 - 피곤한 번역

겨울달C 2019. 1. 27. 02:31

나는 충분히 노력했다.




수전 케인의 TED강의를 흥미롭게 들었었고, 친구가 추천해 줘서 각잡고 읽어 보려고 구매했다. 옮긴이에 '김우열'씨가 있는 것을 보고 아주 조금 불안해짐. 이 분이 쓴 <나도 번역 한 번 해 볼까?>라는 책을 읽었었고 또 얼마 전에 방출했는데, 그 책으로 받은 인상은 '글쎄요'였기 때문. 


아니나다를까, 읽다가 번역이 너무나 피곤해서 몇 번을 덮었다가 폈다가 하면서 꾸역꾸역 다 읽었다. 내가 수전 케인의 TED를 인상 깊게 듣지 않았다면 필시 100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다시 팔아치웠을 것이다. 강의로 봐선 이렇게 피곤하게 글을 쓸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겨우 다 봤다.


번역이 정말 너무나 피곤했던 이유. 수능 영어 해설집 직독직해 같이 문장 구조가 지나치게 투명하고, 숙어와 관용어구로 사용된 전치사를 일일이 쑤셔넣은 문장. 주어와 목적어가 맞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봐도 사전에서 찾은 단어를 그대로 쓴 것 같은 어색함, 그리고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특히 후반부 몇 페이지는 엄청나게 피곤했다. 일단 살펴보자.


p.306 그때 그녀는 동부 해안으로 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지만, 대만의 인기 있는 음료인 거품차를 자기 말고 아무도 마시시 않는 곳에서 살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하다고 말했다.


-지저분한 문장은 둘째 치더라도, 거품차... 버블티... 맞는 말이긴 한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그런 명칭이다.


p.313 땅딸하고 다부지며 매력적인 안경잡이 리틀 교수는 우렁우렁한 바리톤 음성을 자랑하며, 불쑥 무대에서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는 습관과 옛날 배우들처럼 자음은 강조하고 모음은 길게 늘여서 발음하는 버릇이 있다.


-읽는 내 머리가 다 우렁우렁하다. 어떤 사람인지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게 번역을 해놓는 버릇이 있다. 이쯤 되면 본인이 읽어도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 원문을 찾아 대조해 보면 꽤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듯.


p.315 리틀 교수는 성격 특성이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삶에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성격 특성은 생리학적 메커니즘에 기반을 두면서 일생 동안 비교적 안정적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견해를 믿는 사람들은 넓은 어깨들, 즉 히포크라테스, 밀턴, 쇼펜하우어, 융, 최근에는 fMRI 장비와 피부 전도율 시험을 믿는 사람들 위에 올라서 있다.


-원문을 찾아 볼 필요도 없이 관용어구가 투명하게 비치는 대표적인 문장. 나는 방금 전까지 이 관용어구를 전혀 몰랐지만 구글이 알려준다. 다양한 수요와 책임을 수용하는 능력. 문장 호응이 엉망인 건 기본이라 그러려니 하고 넘겨야 한다.


여기까지 읽고 문장 카운트 하다가 매우 화딱지가 나서 인터넷 서점에서 번역가의 이름을 검색해 봄. 그 결과 '김우열' 씨는 현재 '김해온' 씨로 개명을 했다는 걸 알았고 리스트에 올릴 이름이 하나 더 늘었다, 이 사람이 <시크릿>ㅋㅋㅋ을 번역했다는 걸 알고 머릿속 전구에 불 켜짐. 그리고 <시크릿> 번역에 관한 한 독자의 리뷰. 이 리뷰 그대로의 심정을 내가 얼마 전 다시 겪음.


나도 번역이란 걸 안 해본 건 아닌 입장으로서, 그리고 정말 많이 틀려 봤던 입장으로서 번역이 얼마나 식은땀 나는 일인지 어렴풋이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름 걸고 밥 벌어먹는 전문 번역가가 아닌 일반인이라는 강력한 방패 뒤에 숨은 입장으로서, 돈 받고 번역 할 거면 적어도 문장을 피곤하게는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한 두 문장도 아니고 400페이지가 넘는 책 전체가 이런 식이니 독해력까지 같이 곤두박질치는 기분. 그래서 이 책은 내 다음 번 방출 목록에 자동 등록.


출판사별로 번역서 같은 건 홈페이지에 따로 코너를 만들던지 해서 사후 관리 같은 거 어떻게 좀 안 되나... 항상 의문스러운 부분. 출판사가 안 되면 번역가 자신이라도 어떻게 피드백을 좀 해주면 좋겠다. 


<콰이어트>는 TED 강의만으로도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충분하므로, 번역서를 읽어 보고 싶은 사람은 구매하지 말고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