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Dilettantisme/cinéma

ⓕ<덩케르크> 영화 사건 전후 연표 정리

겨울달C 2017. 8. 26. 17:25

정신을 못 차리겠는 것이다 ㅇ<-<

 

 

<출처>

네이버캐스트 스피트파이어

네이버캐스트 허리케인 전투기

네이버캐스트 영국 본토 항공전 1~9

위키백과 다이너모 작전

 

 

1936 - 영국의 신예기 도입 사업 최종 후보: 슈퍼마린의 K5054, 호커의K5083. 성능은 뛰어나지만 비싸고 양산이 어려운 슈퍼마린, 성능은 조금 떨어지지만 양산이 쉬운 호커. 고민하던 영국은 둘 다 주력기로 선택.

 

1937 - 호커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으로 제식화.

1938/6 -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라는 이름으로 양산형 310기 일선 배치.

 

1939/9/3 -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1939/9/6 - 74비행대대의 스핏파이어 편대가 56비행대대의 허리케인 2기를 적기로 오인하여 격추. 스핏파이어의 최초 격추 실적이었음. 이 사건을 계기로 피아식별장치(IFF) 개발이 시작됨.

1939/10/16 - 스핏파이어 편대가 포스 만에 정박해있던 해군 선박을 노리던 Ju88 폭격기 편대를 요격함. 최초의 실전. 그닥 의미가 있는 전투는 아니었다고 함. 폭격기는 느려터져서 호위 해주는 전투기가 없으면 찜쪄먹기 쉽다고 함.

 

1940/5/10 - 영국, 체임벌린 수상 사임. 처칠이 42대 수상이 됨. 독일, 프랑스 침공 개시.

 

1940/5/13 - 네덜란드 상공에서 스핏파이어가 독일 공군과 첫 교전. 연합군이 밀리던 중이라 독일은 스핏파이어가 어떻든지 그닥 신경쓰지 않음.

 

1940/5/20 - 연합군 됭케르크 고립.

 

1940/5/26~6/4 - 다이나모 작전(됭케르크 철수 작전). 철수는 5/31~6/1일에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함. 약 33만 구출. 그러나 거의 모든 물자를 프랑스 해변에 버려두고 와야 했음. 됭케르크 상공에 투입된 소수의 스핏파이어가 철수 선박을 엄호함. 이때 독일은 영국의 새로운 전투기가 만만찮은 상대라는 걸 알았다고 함.

 

1940/6/14 - 아리엘 작전. 프랑스 해변 곳곳에 흩어져 있는 연합군 구출 작전. 약 15만 구출.

 

1940/6/17 - 프랑스, 독일에게 휴전 제의

1940/6/22 - 프.독 정전협상 체결

1940/6/24 - 이.프 휴전 협정 체결

 

독일, 영불해협 봉쇄 선언. 영국 고립. 소강기.

 

6월 내내 영불해협 일대에서는 1~2개 편대 규모의 공중전이 쉴새없이 벌어짐. Bf109(이하 메서슈미트) 한 기가 해협에서부터 스핏파이어를 꼬셔 오면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가 스핏파이어를 다굴쳤다고 함. 미끼가 되는 메서슈미트는 베테랑 파일럿이 하고 숨어있다가 마무리 하는 건 비행시간 적은 파일럿들... 이런 식으로 독일공군은 아직 자기들에 비하면 피래미인 영국공군을 조금씩 소모시키고 있었음.

 

처칠은 독일의 해협 봉쇄를 무시하고 일부러 상선들과 수송선박을 영불해협으로 오가게 했다고 함. 그러면서 공군에 영불해협 수호와 선단 호위를 요청한 상태였음. 당시 스핏파이어는 500여기에 불과해서 공군 대장인 휴 다우딩은 이런 식으로 스핏파이어가 조금씩 소모되는 거에 매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함. 결국 스핏파이어가 단독으로 해협을 건너서 프랑스로 가는 걸 금지시킴. 처칠 수상이 압박해도 ㄴㄴ였다고 함. 이제 영국에게 남은 건 정말 스핏파이어 뿐이라는 걸 다우딩은 알고 있었음.

 

독일은 영국 해군과 싸울 생각이 없었고 영국은 독일 육군과 싸울 생각이 1도 없었음. 그러다 보니 서로 찔러보면서 간 보는 동안 공백기가 생겼는데 이 기간 동안 영국은 공장 풀가동해서 스핏파이어를 140대 정도 더 찍어냈다고 함. 영국은 독불전쟁 이후 2달 사이에 비행대대지휘관 8할이 전사상을 입은 상태. 어떻게든 조종사 충원은 쉬지않고 계속 했지만 거의가 비행시간 짧은 20대 초반의 초임자들이었다고 함.

 

영국의 남부 방어선은 제11전투비행단을 중심으로 제12전투비행단이 백업하는 형식이었음. 제11전투비행단장은 키스 파크 소장. 당시 독일 공군의 물량은 영국 공군보다 세 배정도 많았는데 다우딩과 파크는 이걸 홈그라운드인 점을 이용해서 전투기의 기동률을 세 배로(..) 올려서 만회하려고 함. 그러니까 싸우다가 착륙해서 연료랑 총탄만 보급받고 다시 이륙...하는 걸 독일의 세 배로 뺑뺑이 돌리는 거임. 파일럿의 피로도는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 여기에 영국 비장의 무기 레이더 + 암호 해독이 있어서 어찌어찌 손님맞이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음.

 

1940/7/10 해협전투(지옥불 모퉁이)의 시작 - 본격적인 본토 침공 개시. 레이더에 출격이 감지됨. 독일이 보낸 70여기에 맞서 50여기의 스핏파이어가 출격. 영불해협에서 마주쳐서 도그파이트를 했다고 함. 독일은 4기 손실, 영국은 3기 손실. 30분만에 끝났지만 공중전이라는 새로운 전투의 패러다임이 시작된 날이라고 함.

 

1940/8/11 - 위와 같은 싸움이 한 달간 지속됐음. 다우딩 대장은 더이상의 전투기 손실을 막기 위해 아예 해협전투 포기를 선언함. 영불해협에 더이상 스핏파이어를 띄우지 않겠다는 거임. 처칠 수상과 해군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다우딩 대장은 가볍게 씹어주심.

 

1940/8/13 독수리의 날 - 독일 폭격기 74대가 새벽에 대규모 공습을 가함. 영국 공군은 이날 구름 때문에 규모를 잘못 파악하고 1개 편대의 스핏파이어(6대)만 내보냈다고 함. 스핏파이어가 폭격기 4기를 격추했지만 나머지는 그대로 뚫고 날아가서 주요 시설들을 폭격하고 유유히 돌아감. 그리고 이 소식에 사기가 오른 독일 공군은 오후 3시 45분에 100여기씩 무리지은 전투기를 영국으로 띄움. 이번엔 영국도 차분하게 대처를 함. 키스 파크 소장이 우선 순위를 정해서 요격 지시를 함. 요격 임무 마치고 내려오면 총탄 연료 다시 실어서 또 요격 보내고 다시 오면 보내고... 이런 식으로 막아냄. 그래서 이날 영국의 전투기 손실은 14기밖에 안 됐지만 독일은 48기 손실 + 40기 파손의 손해를 입음. 이날 영국 공군은 슈투카를 리얼로 찜쪄먹었고 이날을 '슈튜카 파티'로 불렀다고 함. 영국의 폭격기 요격 전술은 이랬다고 함. 스핏파이어가 메서슈미트를 물어뜯으면 허리케인이 와서 폭격기 작살. 실제로 매우 효과적었다고 함.

 

1940/8/15 검은 목요일 - 1500여기의 대규모 전투기들이 영국 대공습을 재개함. 영국은 이틀 전 전투로 11전투비행단이 개발살 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보고가 과장됐던 거였음. 북쪽으로 돌아서 날아갔던 독일 전투기는 14전투비행단이 맛있게 요리해 먹음. 이날 독일은 퍼센트 단위로 손실을 입음. 무려 30퍼센트 손실. 이때부터 괴링이 메서슈미트보고 폭격기를 호위하라고 하니까 빡친 메서슈미트 파일럿이 "걍 저희 편대한테 스핏파이어를 주십쇼ㅇㅅaㅇ"라고 했다는 일화... 메서슈미트가 본토 항공전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이미 해협을 날아온 뒤라 본토 체공시간이 10여분 남짓이었다고 함ㄷㄷ...

 

1940/8/19 - 영국군은 내우외환... 11전투비행단을 백업해야 하는 12전투비행단이 비협조적으로 나와서. 그래서 키스 파크 소장이랑 트래퍼드 리맬러리 소장은 회의에서 맨날 싸웠다고 함. 독일은 독일대로 손실을 입고 있었지만 영국도 누적되는 손실 + 극심한 피로도로 힘든 상황이었음.

 

1940/8/24 - 독일의 He111폭격기가 오폭으로 런던 시내를 폭격함. 처칠은 이걸 빌미로 베를린 공습을 지시함.

 

1940/8/25 - 이날 밤, 95기의 영국 휘틀리 폭격기가 베를린으로 날아감. 이후 9월 4일까지 4차례 공습.

 

1940/8/31 - 독일군은 공군기지 폭격으로 전술을 바꿈. 이날 하루동안 40여기의 영국 전투기가 격추됨. 공급되는 전투기보다 손실되는 전투기가 2배는 많았고 파일럿도 태부족이었음. 외국인 파일럿은 물론이고 훈련생들 훈련기간까지 줄여가면서 투입했지만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음. 독일은 슬슬 영국 상륙일자를 점치기 시작함. 처칠은 굳세게 항전을 외쳤지만 공군 지휘부는 난감해했음. 다우딩 대장과 파크 소장은 내부회의에서 더이상 독일공군의 저지가 불가능하다고 인정할 정도였음. 9월 4일까지 계속된 독일군의 공군기지와 주요시설 폭격으로 제11전투비행단은 궤멸 직전 상황에 놓임.

 

1940/9/7 - 베를린에 계속 폭탄이 떨어지자 히틀러가 드디어 폭발함. 9월 7일 히틀러는 런던 대공습을 지시함. 800여기의 폭격기와 600여기의 전투기가 런던으로 날아감. 11전투비행단이 매복해서 좀 긁어봤지만 티도 안 남. 후방 런던쪽 방어를 맡던 12전투비행단도 경악해서 출격했만 이미 폭격기를 막기엔 너무 늦었음. 런던이 불타오르기 시작함. 독일은 47기의 손실을 입음. 독일이 런던의 하늘을 뚜들뚜들 하기 시작하니까 12전투비행단이 고군분투 하는 동안 11전투비행단은 짧지만 회복할 시간을 벌게 됨. 이때 전투기, 조종사를 보충하고 비행장을 복구하면서 빠르게 전력을 가다듬음.

 

1940/9/9 - 런던을 끝장낼 생각으로 날아온 독일 전투기들을 재건된 11전투비행단 전투기들이 철벽같이 막아섬. 간신히 저지선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독일 전투기는 기다리고 있던 12전투비행단한테 마무리를 당함. 후퇴하는 독일 전투기를 11전투비행단이 신나게 잡아먹음. 이틀만에 완전히 뒤집힌 상황에 독일 공군 어리둥절행.

 

1940/9/15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날 - 초조해진 괴링은 결전을 명령함. 500여기의 폭격기와 620여기의 전투기가 해협을 가로지름. 11, 12전투비행단은 기동 가능한 모든 전투기 500여기를 하늘로 띄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스핏파이어는 총탄과 연료를 보충해가며 끊임없이 하늘로 날아올랐음. 메서슈미트와 스핏파이어가 서로를 물어뜯는 동안 폭격기는 런던으로 날아감.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허리케인이 폭격기를 조져버림. 결국 독일은 43기의 폭격기와 18대의 전투기를 잃고 영국은 전투기 29기만을 잃음.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처음 좌절을 맛본 순간이었음.

 

1940/9/17 - 괴링이 어떻게든 이 실수를 만회해보려고 동동거리는 사이 히틀러가 보고를 받음. 그리고 영국 상륙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한 연기하라고 지시함. 이후에도 독소전쟁 이전(1941/5/21)까지 크고작음의 규모 차이는 있었지만 독일공군은 지속적으로 영불해협을 건넜음. 하지만 히틀러는 이미 영국은 포기한 상태. 결국 영국이라는 무시 못할 적을 등 뒤에 남겨두고 독일은 소련을 침공하게 됨.

 

그동안 독일은 2000여기의 전투기와 4900명의 파일럿을 잃었음. 영국은 1700여기의 전투기와 2000여명의 파일럿을 잃었고, 10만명의 시민이 사상을 입고 도시가 파괴되었음. 

 

영국 본토 항공전은 규모는 엄청났지만 직접 전투를 벌인 인원은 소수인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투였음. 처칠 수상은 라디오에서 "이토록 적은 인원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신세를 진 적이 없었다(Never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며 파일럿들의 노고를 칭송함.

 

처칠의 말을 들은 한 공군 파일럿은 '음... 드디어 저분이 우리 월급을 올려주실 생각인가 보군.'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