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 Dilettantisme/etc.

2019 연극 정리

겨울달C 2020. 3. 2. 03:59

난 연극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음. 시작부터 취좃은 아니고 그냥 노래를 안 해줘서 그게 재미가 없을 뿐 특별한 감정은 없음. 그래서 뮤지컬 되는 뮤지컬 배우들은 제발 연극 욕심 안 내고 계속 뮤지컬을 해줬으면 하는 개인적인 희망사항이 있음. 왜냐면 내가 재미가 없잖아(그레이맨). 하지만 보통 뮤지컬만 하고 싶어하는 배우들은 잘 없고 그럼... 

뮤지컬은 그래도 음악이라는 중심 가닥이 있어서 아무리 망했다 한들 전체적인 형태의 흔적이나마 건질 수 있는데, 연극은 한 번 종잡을 수 없게 되면 극 전체가 형체도 없이 흩어지는 것 같음. 그래서 '잘' 만들기가 연극이 훨씬 어렵고 감상하기도 연극이 훨씬 어렵기 때문에 연극은 정말 신중하게 골라 봐야 되는...데... 2014년을 마지막으로 연극 안 보다가 킹아더 후유증으로 '뭐라도 보고싶다' 증후군이 나타나는 바람에 일단 닥치는대로 보게 됨.

 

190806 그을린 사랑

인터미션 15분, 장장 210분을 꽉 채우는 연극. 이것 말고는 다른 정보도, 별다른 기대도 없이 갔는데 그렇기 때문에 6년만에 보는 연극으로는 너무나 강력하다는 걸 몰랐음. 멘탈 단 한 톨도 남김 없이 탈탈탈 털리고, 집에 바로 오지도 못하고 한밤중 올림픽 공원 서성이다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 기억도 안 남. 와서 잠도 못 자고 대본집도 주문하고 영화도 검색해보고-감히 재생하지는 못함- 한참 뒤척이다가 잠듦.

극장 자체가 무대가 되는 연출도 처음이라 정말 놀라웠고 간단한 소품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매개체가 되는 방식이 신선했음. 숨도 못 쉴 정도로 꽉 찬 텍스트와 배우들의 연기, 극장 전체를 작품에 녹인 연출 속에서 210분을 보내고 나서 '우와... 이게 바로 연극인가...' 하는 선입견이 만들어 짐. 그런데 불행히도 바로 다음 날 보게 된 연극이 무려-

 

 

190807 Everybody wants him dead
190809 Everybody wants him dead

구큐였습니다! 하하 이게 바로 연극은 무슨, 이런 것도 연극이다!

그을린 사랑이랑 구큐라니 대진운이 나빠도 너무 나쁘긴 했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닐 거라는 킹리적 갓심이 있음. 하지만 난 이걸 랜슬롯들 보려고 두 번씩이나 봤고... 애배망태기에서 누군갈 끄집어내는 경험을 두 번째로 함. 하지만 극이 극이고 장르가 연극이니 차기작에서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고, 차기작 보고 바로 망태기에 고정석 만들어서 모심. 연극은 극이랑 배우가 잘 맞는 것도 중요하단 걸 체험.

 

'사실은 이새끼도 사연이 있는 불쌍한 놈이야' 클리셰 씌운 악역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이 클리셰는 정말 정성들여서 사전 빌드업을 쌓지 않는 이상 무대에서 '사실은~' 하고 운 띄우는 순간 대부분 관객 쪽에서 '아, 됐고.' 싶어지는 게 가장 큰 약점임. 그을린 사랑급 빌드업을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뭐라도 공감이 가야 고기라도 굽지... 설정을 위한 설정을 가진 캐릭터가 네 명씩이나 모여 있으니까 두 번째 볼때부터는 진짜 제목처럼 '그냥 다 빨리 죽어주세요.' 심정이 되긴 하더라만. 이걸 노린 건가?

생중계로 먼저 보고 음... 가서 보면 다를거야^^; 했는데 별반 다르지 않았고 역시 기본이 가장 중요하단 걸 뼈에 새김. 뮤지컬은 넘버, 연극은 텍스트.

 

 

190810 비너스 인 퍼

구큐로 상한 마음 아프로디테님이 치유해 주심. 만세! 아프로디테! 경미벤다는 천재고 저는 빡빡이입니다... 엔딩 암전 팍 될 때 머릿속에는 전구 켜짐. 텍스트 꽉 찬 연극 너무 좋아!!!

 

 

191003 히스토리 보이즈

2019년 연극 관극은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가는 느낌임(..). 이 중에서 최고 상식인 캐릭터는 놀랍게도 교장선생님이었고 교장선생님 뿐이었음.

 

2004년 영국 극작가 원작. 이 작품이 2004년 영국에서 올라갔을 때는 그 사회 속에서 공유했던 메시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2019년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와닿지 않음ㅋㅋ 작가는 오 캡틴 마이 캡틴을 영국식으로 써보고 싶었던 것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가 그렇게 명작이라고 하길래 봤을 때도 지금이랑 비슷한 불쾌감을 느꼈었음. 남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한 엘리트 계급 교육 자체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게 가장 크기도 하고.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89년 미국 작품이고 이건 2004년 영국 작품인데 15년 세월이 무색하고 2019년 한국 4연을 봐도 15년 세월이 무색하다...

 

텍스트는 꽉 차 있는데 꽉 차서 좋은 게 아니라 흘러넘쳐서 산만의 끝을 달림. 수많은 문학 인용구가 매력이라고 치자. 그런데 그건 같은 문화 기반을 공유한 사회 안에서나 기발한 매력이지, 이역만리 한국땅에서는 매력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일 뿐임. 작품 속에 인용된 문학 작품 해설만 모은 책자도 따로 팔던데, 설명이 필요한 드립은 뭐다? 실패한 드립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글을 쓰는 2020년 3월 이 시국에 누군가 대한민국 학교 교실에서 기침을 하는 상황을 가정해 봄. 거기서 교사가 근엄한 목소리로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어?"라는 명대사를 인용한다면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웃을 거임. 한국 교실 속 교사와 학생은 '궁예의 광기가 만든 불합리한 상황이 자아내는 웃음'이라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문화적 밈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임. 하지만 만약 이 명대사를 영국 엘리트 기숙학교 교실 한가운데에서 인용한다면? 기침 소리 하나에도 일일이 반응하는 예민한 스네이프 교수가 되는 거임.

취학기간 내내 셰익스피어를 교과서처럼 읽는 영국인이거나 영문학 전공자라면 쏟아지는 인용 속에서 흥미를 느낄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토종이라서. 그러면 극 자체의 흐름이라도 큰 의미가 있냐면...

글쎄...

 

 

191003 이갈리아의 딸들

캐스팅보드라고 할만한 게 없어서 티켓인증으로 대신. 티켓 오픈 당일 예매하긴 했는데 잠깐 잊고 있었다가 뒤늦게 들어갔더니 이미 눈밭이라 어리둥절... 취켓팅으로 겨우 한 장 건져서 보고 옴. 이 작품을 다른 형식으로 바꾼 건 내가 알기로는 이번이 처음이라 정말 너무 궁금해서 어떻게 해서든 꼭 보고 싶었음. 드물게 극보다 원작을 먼저 읽은 케이스여서 기대가 상당히 컸음.

 

1막은 거의 원작 그대로였고 보면서 승천한 광대가 내려오지를 않았음. 인터미션 집어치우고 계속 해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런데 2막은 뭔가 산으로 가는 것 같다가... 엔딩에서는 ㄴㅇㅁㅇㄱ 됨. 

 

하긴 원작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도 연출 입장에서는 영 재미가 없을 수 있음. 하지만 1977년과 2019년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데 선택과 집중을 해서 원작을 극으로 보여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듦.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너무나 많아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됐을 때쯤 장미칼로 끊는 것처럼 엔딩 '당함'. 엔딩이 어떤 식이었냐면, 갑자기 객석에 불 환하게 들어오더니 돌출무대 3면 객석과 전 출연 배우가 컵라면 익는 시간동안 눈싸움 함. 그러더니 모두 퇴장함(..). 끝. 엄...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는데 알기 싫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프로그램 북에 있는 이경미 연극평론가의 글을 분절해서 가져와 봄. 제목은 '불쾌, 불편의 미학 - 그들이 극을 말하는 방식'. 김수정 연출이 극단 신세계와 함께 했던 작품들을 주욱 읽어 주면서 이번에 올리는 극과 다리를 놓아주는 글이었음. 읽으면서 이전 작품을 직접 봤으면 트라우마 생겼을 수도 있겠다(..) 싶고 그래도 이번 거는 비교적 순한 맛이라 다행이다 싶었음.

 

글 전체에서 가장 좋았던 문단. 사람들이 연뮤를 보는 이유.

 

전작은 차라리 못 봐서 감사합니다(..)하고 생각한 부분. 트라우마 각...ㅠㅠ

 

읽으면서 마음에 걸렸던 표현에 밑줄을 그어 봄. 드라마적 재현은 클래식한 극의 형태이고 나는 그게 관습이라고 불릴 만큼 진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음. 드라마적 재현만으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이미 충분함.

 

그런데 '관객의 무감각한 몸'이라는 표현을 읽는 순간 위에서 읽은 '그런데 극장 안의 이 거북한 우리의 포르노는 견딜 수 없다고 소리 지르면서, 극장 밖에서 주구장창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며 상대를 압도하는 그 온갖 역겨운 '포르노들'에는 왜 정작 무감각한지, 눈을 감는지.'라는 문장이 연결되면서 힘이 빠짐. 관객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행간이 보여서. 소통? 너무 일방적인 소통인데.

관객은 계몽의 대상이 아닙니다(..). 나는 돈을 주고 깨시민 수업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 그리고 깨우침이 필요한 '무감각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돈을 주고 공연을 보러 오지 않지... 관객은 소비자. 소비자소비자소비자... hㅏ...

 

그래서 이 극이 싫었냐면 꼭 그런 건 아님. 지금으로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씁쓸함. 극의 목적이 극에 있지 않고 관객으로 이동한 느낌. 이런 느낌의 작품 본 적 있지... 교양 수업 과제로 봐야 했던 극들이 그랬지...

극의 주제 의식을 극 안에 깔끔하게 갈무리 해버리면 관객이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떤 극은 관객의 멱살을 쥐어다가 극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리고 어떤 극은 아예 극 내용 자체를 관객의 몫으로 떠밀어버림.

그리고 나는 관객을 믿고 극 자체에 집중해서 만든 세련된 극이 더 좋음. 이렇게 또 취향을 알아가고...

 

하지만 개인적인 아쉬움과는 별개로 배우들은 정말 헉 소리나도록 잘했음. 리즈 배러스커리 역 김시영 배우, 루스 브램 역 박지아 배우, 그로 메이도터 역 김선기 배우가 내 쓰리탑이었고 다른 배우들도 이게! 연극이다! 싶은 생각이 아깝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줌. 무대나 의상도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흥미롭게 봤음. 표를 구할 수만 있었으면 한번쯤 더 봤을텐데 두 번 다시 없었음. 나같은 뜨내기가 보지 않아도 이미 볼 사람이 줄을 섰다는 건 한번 더 돌아볼만한 문제.

 

극에 확실한 주제 의식이 있고, 또 그 주제 의식이 내가 느끼는 바와 일치할 때 극이 주는 희열은 말로 다 못할 정도로 짜릿함. 그래서 1막까지는 너무 좋아서 눈이 돌아간다(..)는 게 뭔지 실감할 정도로 눈 동그랗게 뜨고 봤고, 이 기대감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한 것이 내심 아까웠음. 그러나 젠더 의식을 담은 극은 훨씬 더 많아져야 하고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더 많은 목소리들이 서로 부딪쳐야 함. 휩쓸리지 못하면 변하지도 못하니까.